가을낙엽과 함께 죽음의 소식이 찾아왔다. 학술회 준비로 내 머릿속은 바빠지고 학술회 이외 모든 일정들은 뒤로 미루었다. 하지만 가까운 죽음은 모든 것을 우회합니다. 여러분들이 학술회를 위해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난, 그 친구의 죽음과 함께했습니다.
가까웠던 고등학교 친구. 우린 테스타스트론 홀몬이 활발하게 분비되던 학창시절 많은 추억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그 친구의 삶 속에, 그것도 그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난 그의 삶 중심에서 함께 했습니다. 그 친구는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을 마치고 정형외과를 전공하던 중, 우연한 돌발적 사건으로 레지스던트 프로그램을 중도하차하고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든 것처럼 고등학교 동창이란 인연은 미국에서 다시 이어졌죠.
American dream의 기대감은 친구에게 쉽지 오지 않았습니다. 외국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반듯이 거쳐야 할 ECFMG 시험이 그에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친구는 계속되는 낙방으로 인내하기 어려운 낭인생활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난 온 맘으로 그 친구를 위한 기댐 돌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죠. 주말이면 함께 먹고 마시면서, 내 집은 그의 쉼터였고 술기운이 오를 땐 내 기타소리에 그는 힘겨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난 이미 팔머대학을 졸업한 후 클리닉을 개업하고, 주위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집에 살고, 스포츠카를 타고 다녔던 30을 갓 넘은 1984-5년 때였습니다.
미국에서의 의사생활, 특히 생존모드로 살아가는 우리 교포사회에선 부러워하는 삶의 대상입니다. 경제적 풍요로움 뿐 아니라 교포들에게 여러 모로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죠. 병원생활에 쫓기면서 가족생활에는 인색할 수밖에 없는 의사로서의 삶이지만 충분한 대가가 보장되는 일이죠. 그 삶을 위해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던 그 친구...... 그러나 핑크빛 무지개는 쉽게 오지 않았답니다. 그의 낭인생활은 계속이어 졌고 기대감으로 그를 바라보는 눈길에 그는 더욱 힘들어 했죠. “ 열심히 해, 포기하지 말고” 라는 주위 친구들의 말....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했답니다. 고등학교 시절 당구실력 500이 넘었고, 만능 운동선수였고, 의대입시를 위해 공부에도 열중했었던 멋진 이 친구는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 주강아, 의대 나왔다고 의사일 만 해야 사나? 딴 일하면 안 돼 ? ” 그럴 땐 “ 닥터 원, 初志一貫 이란 말도 몰라 ” 하면서 그 놈의 의지를 꼭 붙으러 맺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there is a way where there is a will" 이 친구를 두고 한 말입니다. 시련의 긴 시간이 지나간 후, 드디어 그는 극적으로 시험을 패스하고 우린 축하파티를 거하게 내 집에서 했습니다. 술이 취한 그 부부는 내 어깨를 잡고 엉엉 울었답니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아프게 다가왔죠.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그에게 켈리포니아 트레이닝 병원의 문은 차갑기만 했습니다. 결국, 닥터원은 누구도 원치 않는..... 의사의 체면과 자존심이 존경받지 못하는..... 노예계약으로 생활보장도 받지 못하는..... 나치 포로수용소와 같은 뉴욕의 한 종합병원의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위해 켈리포니아를 떠났답니다. 오늘처럼 가을비가 내리는 날 저녁, 내가 구해 준 차를 타고 가족함께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가도 가도 일주일이 걸리는 여행길을 떠나는 친구의 뒤 모습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초년생 의사로서 무거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동창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무서운 집단입니다. 어려운 수련의 시기, 닥터원은 뉴욕에 있는 동창들의 도움으로 어려움들을 극복했답니다. 무지한 하류바닥을 거칠게 살아가는 쓰레기 같은 환자들 그리고 병원스탭들의 인종차별적 고함소리를 참아내어야 했고. 에이즈 환자와 마약환자들이 들끓고, 피고름을 짜내는 수련의 과정을 그는 이겨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당히 미국 내과전문의가 되었죠.
닥터원은 지난 어려운 시절에도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친구들에게, 믿고 따라 주었던 집사람에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자라준 애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습니다. 교포사회의 중심인물로 사라갔습니다. 골프시합에서 일등하고, 테니스 시합에서 일등하고, 당구시합에 일등하고, 바둑시합에 일등하고....... 그리고 자신의 옛 시절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앞줄에 서서 받은 사랑을 나누었죠. 그런 친구였습니다.
우린 은퇴하면 같이 살자했습니다. 약속대로 난 그 친구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뉴욕의 허드슨강을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파트를 장만했죠. 곧 가겠다! 했는데..... 이제 그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암이 간으로 퍼지고 척수로 전이되었는지 그의 걸음은 뒤뚱거렸고, 오른쪽 팔은 사용할 수 없었고, 얼싸안았을 땐 뼈만 앙상하게 만져졌습니다. 그의 미소에는 힘이 보이지 않았고 두 눈은 희망을 놓은 듯했습니다. 그래도 친구가 보고 싶어 서울로 나왔답니다. 저녁을 먹고 그 친구는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무대 위로 끌어올려진 닥터원은 “ for the good time " 이란 노래를 불렀었고, 다음 날 새벽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답니다.
갈색으로 물든 플라타나스의 큰 잎이 가을비에 젖어 테해란로 길 위에 떨어지는군요. 이번 친구의 죽음을 되돌아 보면서 되새겨 봅니다. " Hey, Dr. Lee! are you having fun out of your life? Just go ahead, do and enjoy what you like to do " 닥터원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chiropractically y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