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 얘기들....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5-01-16



오늘은 내 집식구 얘기를 하려한다.

 

우린 대가족 집안이다. 형제가 13명이다! 아들 10, 딸이 3명이고. 그리고 난 막내아들로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때론 형제들의 이름도 잠시 생각해 봐야 할 정도다. 형님들의 이름은 이렇다. 우린 주자 돌림이다. 이렇게 나간다. , , , , , , , , , 강이다. 앞에 주자만 부치면 이름이다.

 

고향은 이북 함경남도 북청이다. 아버님은 내가 졸업한 휘문고등학교 제 1회 졸업생이다. 62회다. 연세 의과대학의 전신인 연희의전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다시 영문학을 공부하셨다. 일본이 우리를 지배했던 일제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서울생활이 편하지가 않았다. 이 시대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폭정을 피해 간도라고 하는 만주지방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면서 독립운동을 태동시킨 곳이다.

 

1945년 독립이 되면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러나 김일성의 거짓됨을 알았던 아버님은 공산주의를 피해 다시 서울로 이주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이북은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는 38선을 그어놓고 사람들의 자유통행을 막았다. 야음을 통해서 가족 하나하나를 이남으로 피신시키는 과정에서 육이오 전행이 난 것이다. 그리고 이북에 남겨진 형제들과 지금까지 이별의 고통을 앉고 살고 있다.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형제들은 부루조아의 가족으로 낙인되고 형제들은 고통을 받고 살았다. 큰 형님은 돌아가셨고 둘째 형님은 서울에서 택시타면 45분이면 갈 수 있다는 황해도 해주의 보건소 소장 ( 병리학 전공 )으로 일을 하셨다. 3째 형님은 육군사관학교 학생이었다. 육이오 전쟁의 혼란 속에 사관생도로서 경찰에 배치되어 강원도에서 전사하셨다. 지금은 동작동 국군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우리가족의 꿈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부모님은 미국이민을 결정하셨다. 그리고 1970년에 미국 켈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로 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족의 특징은 과할정도로 남다른데 가 있었다. 그야말로 헤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철학으로 살아온 집안이 된 것이다. 이 말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부셔져 버렸고 비통감에 잠겨있던 우리나라 국민에서 준 첫 번째 말이다.

 

가족이 많다보니 형제들의 생일, 조상님 제사,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새해....등등의 이유로 거의 매주 가족들은 함께 했다. 우린 서로 싸우면서 사랑하고 살아왔다. 45년이 흘러가면서 우리 가족도 많은 변화가 왔다. 먼저 내가 서울에 나와 있고 형제들은 3곳으로 갈라졌다. 몇 형제들은 여전히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지만, 한 형제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고, 또 한 구릅은 뉴욕 지역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서 결혼한 형님들은, 나를 포함해서, 다행스럽게 한국여인들과 결혼하였지만, 여동생은 유태인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식구들이 모이면 색깔이 좀 다르다. 물론 그들도 김치 없이는 3일도 못가는 입맛이 토종 한국인이다. 그런데 누님의 딸 역시 유태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가족모임이 있을 때는 총천연색이다. 가족들이 나누는 음식들은 자연스럽게 그야말로 퓨전음식이다. 스테이크에 김치, 갈비에 샐라드, 만두에 치즈, 비빔국수에 갈릭토스트. 잡채에 와인, 핏자와 깍두기, 오징어 복음과 스카치, 스파게티와 젓갈김치..... 벌써 침이 고이네요.

이젠 대 가족이 됐다. 태어난 조카 이름? Jonathan, Christ, Sophia, kelly, Maureen, Michael, David, Vicky, Ray, Simon, Ashley, Andrew, Sammy, Caroline, 이름이 생각 안 나는 조카도 있네요 !!!!

 

첫 아들놈은 항해학을 전공했고 둘째는 음악( 플릇 )을 전공했다. 조카들은 호텔경영학, 영문학, 변호사 ( 2), 소아과 의사, 간호사, 예술역사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독방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IT벤처 사업 사장을 하고 있는 24 살 된 조카도 있다. 유명대학을 나와 불란서 레스토랑에서 세프하는 놈도 있고. ,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지금도 헐리우드를 헤메고 다니는 조카도 있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두 형님들은 미국 땅에 묻히셨다. 사랑스러운 내 가족들이다. 그리고 내가 어서 미국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해면 지금도 내 세뱃돈을 기다리는 돈 잘 버는 조카들이....... 지금 그들이 보고싶다

한주영  2015-01-17
교수님, 행복해보이시네요. 다시한번 한국에 와주셔셔 감사합니다. ^^
안성현  2015-01-17
은사님 카이로프랙틱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출어람 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이중현  2015-01-17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으시겠네요..미국에 안들어가신지도 꽤 되신거 같은데..올해 정년퇴임 하시고 (만약) 교수님이 미국에 들어가시면.. 저희가 교수님을 그렇게 그리워 할겁니다 ㅠㅠ
김종건  2015-01-17
가족.... .... 저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시면 얼마나 시릴까 하고요. 정말 빠른세월.. 두렵죠 해야 할께 너무 많은 나이인데 항상 부모님께 잘해드리지 못해서요. 교수님 이야기 들으니 정말 파란만장하단 생각이 들어요 영화 같아요..
유성용  2015-01-21
항상 교수님 얘기 전해듣다보면 한편의 영화와 같단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희 딸도 교수님 세뱃돈 기다리고 있어요 ^^ 아무쪼록 올 한해도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교수님^^
최인수  2015-02-10
교수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왠지 교수님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