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빛 만은 아니었던 대학생활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4-08-06

 

입학식은 마쳤다. 이젠 시작이다. 공부집중 이외 해야 할 일이 또 하나있었다. 알바다. 우리 가족은 귀족이민자가 아니었다. 학비는 내가 해결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저이자의 대학대출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것도 카이로프랙틱 대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어느 전공분야보다도 대출조건이 좋았다. 근데 나의 어리석은 순진한 생각이 어려운 대학생활로 이어지게 한 것이다. 모든 은행대출은 후에 갚아야 할 빚이라 생각했고 가능한 내가 벌어서 학비를 충당하리라 한 것이다. 물론 그건 불가능했다, 대학 학비가 워낙 비쌌으니까. 난 최소한의 대출을 받으면서 학비를 보충했다. 그건 나에게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내 알바는 거의 정규직 수준이었으니까. 팔머대학 생활은 공부와 생존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친구, 엔도 미츠까와는 중고 스포츠가를 샀다는데....... 백인 친구, 랄프는 할리 오토바이를 샀다는데........ 그들의 아파트는 큼지막했고 스테레오는 혼자 사는 남자에게는 필수품이었는데........ 난 그것도 없었다. 오직 수업참석과 일뿐이었고 아무도 찾지 않는 내 아파트는 지하의 작은 공간일 뿐이었다. 지금도 지하실의 쾌쾌한 냄새 기억난다. 그래도 나만의 공간속에서 많은 꿈을 꾼 곳이다.

 

하루 수업 일정이 모두 끝나면 난 대학 내 TV 방송에서 일을 했다. 내가 일하던 부서는 교내 방송과 함께 모든 강의실의 오디오와 비데오 시설을 착오 없이 준비하는 것이다. 팔머 패밀리는 방송사업으로 미국 중서부 지방의 재벌이 된 집안이다. 카이로프랙틱만 잘한 것이 아니라, BJ 팔머 박사님은 뛰어난 사업가였다. 대학 뿐 아니라 WOC ( World of Chiropractic ) 방송국을 운영했다. 유명한 일화는 그 방송국에서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된 Ronald Reagan 스포츠 아나운서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교내 방송국 일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취한 알바였다. 교내 방송국 부서를 관리하던 Dr. Zemelka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역전의 용사였다. 날 예쁘게 아니, 불쌍하게 봐줘 날 픽업한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는데 미국에서 죽는 모든 개들을 한국에다 보내주면 좋겠다고. 여러분들은 이 말을 고깝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순수하게 받아드릴 수 있었다. 그 시절 남한은 북한보다 못살았으니까.

 

이 알바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이로프랙틱 학계에 모든 거장들을 내가 직접 모실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유명한 Dr. ThompsonDr. Gonstead, AK 창시자 Dr. Goodheart, Bilateral PI & AS를 주장하신 Dr. Peirce & Wagon, 상부경추의 Dr. Grostic, HNP 치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Dr. Cox, 경추 Lordosis 회복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Dr. Pettibon, 카이로프랙틱 교육계의 또 한 거장인 Dr. Cleverland, Activator 테크닉의 Dr. Alan Fuhr....... SOT 창시자 Dr. De Jarnette......그들이 잡아주었던 그 손맛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것뿐만 아니다. 난 레스토랑에서 헤드웨이터였고 동시에 바텐더 일을 했다. 음식을 나르고 술을 만드는 일이다.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하루는 끝이 나는 것이다. 공부? 한국에서 단련된 하루치기 시험공부 !!!! 우등생 친구 Ralph가 없었다면, 내 이름 뒤엔 DC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한 예기가 있다. 겨울 알래스카 연어잡이 어부 한번 하면 일 년 먹을 돈과 학비를 번다고 뉴질랜드 친구가 가자고 한다. 선상에서 일을 하다가 바다에 빠지면 4분만에 죽는다고 했다. 돈 욕심으로 응모했지만 체구가 작다고 떨어졌다. 그렇다고 그 겨울방학 논 것이 아니다. 새벽시간 허리까지 내린 눈길을 걸어 대형백화점 바닥 청소 갔다. 이렇게 내 팔머 생활은 Gray's Anatomy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시간 날 때 마다 하얀 반바지 입고 테니스치는 로맨틱한 대학생활은 아니었다. 땀과 음식냄새로 물들은 고행의 길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었던,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하였던 Davenport 여인들의 예기는 소주 없이 어떻게 하겠는가. The time of Palmer life was not that bad after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