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돌아온 모국 ! 작성자 : 이주강     작성일 : 2013-01-26

 

40년 만에 돌아온 모국

 

작년, 이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올랐다. 19738월 어느 날, 무정한 한 여인에 몸을 통해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곧 거리에 버려졌다. 6개월 후,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그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는 아기의 이름을 플뢰르, Fleur ” 꽃이라고 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 프랑스, 어떤 환경 속에서 그리고 어떤 과정을 지나면서 성장되었는지는 모른다. 생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그녀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다.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녀가 오는 325일 자신이 태어난 그리고 버려진 한국을 방문한다는 아침 소식이었다. 물론 이 여인의 한국 방문은 공식적인 일이다.

 

오래전, 미국 서부 태평양에 접하고 있는, 오레곤 주 지역을 자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내 어머니 친구 중 한 분이 나에게 부탁을 했다. 1960년 미국으로 입양시킨 딸을 찾아봐 달라는 것이다. 한국전쟁 중 고아가 된 수 많은 아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킨 홀트사회단체가 미국 오레곤주에 있는 셀렘이라는 도시에 있기 때문이었다. 6살쯤 되었던 그 여자 아이, 성경이를 나도 어렴풋이 기억했다. 한 동안 우리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홀트단체를 찾아간 난 깜짝 놀랐다. 나의 방문목적을 귀담아 듣던 부서장은 직접 서류를 찾기 위해 나와함께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 지하실은 한국에서 온 입양아들의 서류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 큰 공간이.... 한국인 입양아 서류로 꽉 찼다 !!!!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오래 전에 입양이었기에 한참을 뒤적거리면서 서류를 찾아내었다. 서류 속에 있는 낡은 흑백 사진에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양부모의 사진도 봤다. 아리조나주에 있는 작은 도시에 있는 가족이 입양한 것이다. 나의 요청에, 입양규칙에 따라 홀트단체는 그녀의 양부모에게 생모가 찾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미국남자와 결혼하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마음 아픈 답이 왔다. 입양아, “ 성경, Grace ”이는 생모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들의 연락처와 전화번호는 규칙에 의해 주어지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이 있다. 5년 전, 내 연구실로 전화가 왔다. 유창하지 못한 영어로 날 만나고 싶다고 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있어, 몇 시간 후 내 연구실을 방문했다. 카이로프래틱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회사동료가 날 소개한 것이다. 몇 번 치료를 통해 친해졌다. 이 친구는 어린나이에 네델란드로 입양되었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이 친구는 생부모도 찾아볼 겸 한국회사에 취업을 택한 것이다. 3년간 머물었지만 생부모는 찾지 못했다. 계약을 마친 후, 자신의 고국인 네델랜드로 떠나기 전 날, 한국에 와서 찾은 건 “ Dr. Lee ” 당신 밖에 없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웃으면서 돌아갔다. 지금도 가끔 안부 연락 한다. 네델랜드에 오시면 꼭 연락 달라고...... 지금은 그 곳 여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한국인, Korean"  보다는 "지구인, Earthian"  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chiropractically yours,

 

 

이중현  2013-01-26
참 다방면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 오셨네요 ㅎㅎ 좋은 경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신현호  2013-01-28
교수님도 많은 경험을 하셨네요 ㅎㅎ 가슴 뭉클한 글이였습니다 ^^
김종건  2013-01-29
넓은 마음을 가져야 겠네요.. 저는 속이 좁아서 그런지 형제끼리도 앙아 싸우고 사는데 ..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는것 그건 참 행복한 일인데 너무도 쉽게 생각했나봐요.